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 광복에서 건국까지, 혼란 속의 3년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3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 미·소 분할 점령, 신탁통치 논쟁, 좌우 대립, 단독정부 논란을 거쳐 두 개의 국가가 탄생했다.
광복 직후의 혼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미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진주했다.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한반도를 둘로 나누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됐다가 미군정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했다. 김구는 11월 귀국해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주장했다. 좌파 계열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신탁통치 논쟁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5년간 신탁통치 안이 발표됐다. 국내는 즉각 반탁 운동으로 들끓었다. 우파(이승만·김구)는 즉각 독립을 요구하며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좌파는 초기 반탁에서 입장을 바꿔 모스크바 결정 지지로 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좌우 대립이 극적으로 심화됐다. 이후 미·소 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결렬됐다.
신탁통치란
신탁통치(trusteeship)는 즉각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할 때 일정 기간 강대국들이 대신 통치하는 제도다. 조선에 대해서는 미·영·소·중 4국이 최대 5년간 신탁통치 후 독립시킨다는 안이었다.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
1947년 미·소 공동위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유엔 결의에 따라 1948년 남북한 총선거가 추진됐으나 북한이 거부했다. 유엔 소총회는 선거 가능 지역(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고, 7월 20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됐다.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 1945. 8. 15 – 광복
- 1945. 12 –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통치 결정
- 1948. 5. 10 – 남한 총선거 실시
- 1948. 7. 17 – 제헌 헌법 공포
- 1948. 8. 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 1948. 9. 9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인물 | 입장 | 결과 |
|---|---|---|
| 이승만 | 단독정부 수립 주장 | 초대 대통령 |
| 김구 | 통일 정부 수립 고집 | 1949년 암살 |
| 김일성 | 북한 단독 수립 | 북한 초대 수상 |
자주 묻는 질문 FAQ
Q. 제헌 헌법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
A.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은 민주공화국, 주권재민, 기본권 보장을 핵심으로 했다. 대통령제를 채택했으며, 국회(단원제)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 출발했다. 제헌절인 7월 17일은 현재 국경일이다.
Q.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건국인가?
A. 학계와 정치권에서 논쟁이 지속되는 주제다. 한쪽은 1948년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의 기원이며 1948년은 정부 수립이라고 본다. 대한민국 헌법은 3·1 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헌 헌법 원문을 볼 수 있다.
Q. 김구는 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나?
A. 단독정부 수립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전체 한반도를 아우르는 통일 정부 수립에 평생을 바쳤다.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