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의 배경과 과정 – 이성계는 어떻게 새 왕조를 세웠는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500년 넘게 이어진 왕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고려 말 수십 년에 걸친 혼란과 모순이 쌓인 결과였다.
고려 말의 혼란
14세기 후반 고려는 안팎으로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부상하는 혼란 속에서 외교 노선을 두고 갈등했다. 홍건적(1359, 1361년)과 왜구의 침입이 잦아 민생이 황폐해졌다.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해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노비로 전락하는 현상이 심화됐다. 불교 사원의 토지 겸병도 문제였다. 고려의 지배층은 개혁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이성계의 부상
이성계는 동북면(현 함경도) 출신의 무장이었다. 1380년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요동 공략을 놓고 최영과 대립하면서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결정적 전환점은 1388년 위화도 회군이었다.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요동으로 출병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했다.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조선 건국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것은 정도전이었다. 성리학자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적 통치 질서를 앞세워 새 왕조의 이론적 기반을 다졌다.
위화도 회군
1388년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나서며 4불가론을 주장했다. 소국이 대국을 거스를 수 없고, 여름 출병은 농사와 병사에게 해롭고, 군사력이 약하며, 전염병이 돈다는 이유였다. 이후 회군은 단순한 군사 철수가 아니라 역성혁명의 시작이었다.
개혁 정치와 왕조 교체
이성계 집권 후 정도전 주도로 과전법이 실시됐다.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관리들에게 재분배하는 개혁이었다. 이로써 경제적 기반이 재편됐다. 1392년 공양왕으로부터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됐다. 새 왕조의 이름 ‘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정통성을 담은 이름이었다. 수도는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옮겼고, 1394년 천도가 완료됐다.
- 1380년 – 황산대첩, 이성계의 군사적 명성 확립
- 1388년 – 위화도 회군, 실권 장악
- 1391년 – 과전법 실시, 경제 기반 재편
- 1392년 – 조선 건국, 이성계 즉위(태조)
- 1394년 – 한양 천도 완료
| 항목 | 고려 말 | 조선 초 |
|---|---|---|
| 지배 이념 | 불교 | 성리학 |
| 토지 제도 | 권문세족 겸병 | 과전법 재분배 |
| 외교 노선 | 원·명 사이 갈등 | 명 사대 정책 |
자주 묻는 질문 FAQ
Q. 정도전은 왜 나중에 죽임을 당했나?
A. 정도전은 신권(신하 중심) 정치를 추구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태종)이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숙청했다. 조선 건국의 두 주역이 충돌한 사건으로, 이후 왕권 중심 체제로 귀결됐다.
Q. 정몽주는 왜 영웅으로 기억되나?
A. 고려에 끝까지 충성했다는 절의 때문이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단심가’로 응답한 것은 충절의 상징이 됐다. 조선도 충성의 모범으로 정몽주를 높이 평가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 건국 관련 사료를 볼 수 있다.
Q. 위화도 회군은 잘못된 결정이었나?
A. 역사적 평가가 갈린다. 당시 명나라와의 전쟁은 무리한 선택이었다는 면에서 현실적 판단이라는 시각도 있고, 역성혁명을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다는 비판도 있다.